20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온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가 중국계 캐릭터의 인종차별적 설정으로 아시아 곳곳에서 거센 보이콧에 직면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중국계 캐릭터 친저우(秦舟)의 이름이 서구권의 중국인 비하 표현인 칭총(Ching Chong)을 연상시킨다는 비판이 나왔고, 촌스러운 스타일링과 설정 역시 문제로 지적됐다.
21세기도 26년이나 지났지만 서구권 영화에서의 동양인 비하는 여전하다. 더 이상은 예전식 노골적 옐로 페이스(yellow face)만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여전히 동양인은 조롱의 대상이거나 백인 중심 서사를 돋보이게 하는 소모품으로 다뤄지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영화계를 뜨겁게 달궜던 작품들 역시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할리우드의 차별적 시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논란을 빚었던 몇몇 작품을 되짚어봤다.
◆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
킬 빌 시리즈 등을 연출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2019년 선보였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는 1960년대 할리우드에 대한 거장의 헌사로 불리며 극찬을 받았으나, 아시아계 관객들에게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극 중 아시아 무술의 전설인 브루스 리(이소룡 분)를 오만하고 입만 산 허풍쟁이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브루스 리는 무하마드 알리를 자신이 이길 수 있다며 거들먹거리다, 백인 스턴트맨인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 분)와의 대결에서 무참히 자동차에 내동댕이쳐지는 굴욕을 겪는다.
이소룡의 딸 섀넌 리는 "내 아버지는 당시 백인 중심 할리우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백인 배우들보다 세 배는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라며 "영화는 아버지를 그저 오만한 백인들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라고 강력히 규탄했다. 이소룡과 절친했던 전설적인 농구선수 카림 압둘 자바 역시 작품을 향해 "인종차별적이고 게으른 연출"이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타란티노는 "이소룡은 실제로도 거만한 사람이었다"라며 자신의 연출을 굽히지 않으면서 아시아계 영웅의 유산을 백인 캐릭터의 마초성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는 뼈아픈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 리코리쉬 피자
2022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거머쥔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 리코리쉬 피자는 개봉 직후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극 중 백인 레스토랑 사장인 제리 프릭(존 마이클 히긴스)이 자신의 일본인 아내들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였다. 제리 프릭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첫 번째 일본인 아내에게, 마치 자신이 일본인이 된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가짜 일본어 억양(Mock Asian Accent)으로 영어를 구사하며 조롱한다. 이후 두 번째로 맞이한 또 다른 일본인 아내에게도 똑같은 방식의 인종차별적 억양을 구사한다.
미국의 아시아계 미디어 행동 네트워크(MANAA)는 즉각 성명을 내고 "아시아인에 대한 묻지마 증오 범죄가 급증하는 시기에, 아시아인을 우스꽝스러운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장면을 단순한 유머로 소비했다"라며 영화제 시상 보이콧을 촉구했다. 파장이 커지자 감독은 "1970년대의 시대상을 정직하게 보여준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으나, 백인 관객들의 폭소를 유도하기 위해 아시아 여성의 언어를 왜곡하고 대상화했다는 점에서 할리우드가 지닌 은밀한 인종차별의 대표적 사례로 낙인찍혔다.
◆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마블 스튜디오 최초로 아시아인 슈퍼히어로를 단독 주연으로 내세운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역설적으로 할리우드가 동양인을 어떻게 차별해 왔는지를 증명하는 씁쓸한 이정표가 됐다. 영화 자체는 아시아 문화를 존중하려 애썼으나, 원작 코믹스가 가진 태생적 원죄가 발목을 잡았다. 원작 만화에서 샹치의 아버지는 서양인들이 만들어낸, 최악의 동양인 악당 프레임인 푸 만추(Fu Manchu)였기 때문이다. 푸 만추는 찢어진 눈, 긴 수염, 교활하고 잔인한 성정을 지닌 채 서양을 파괴하려는, 황인종의 공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종차별 캐릭터다.
제작진은 이 치명적인 꼬리표를 떼기 위해 영화 속 인물을 웬우(양조위 분)라는,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새로운 캐릭터로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서구 매체가 동양인을 악의적으로 소비해 온 뼈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중국 관객들은, 캐릭터의 설정 변경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뿌리가 아시아인 혐오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결국 작품은 중국 본토에서 단 한 번도 극장 스크린에 걸리지 못한 채 상영 금지를 당하며, 할리우드가 과거에 저지른 차별적 창작이 얼마나 깊은 흉터로 남는지 보여줬다.